대화 1 발췌


◌ 임지애, 손옥주, 홍정아

대담자  임지애(이하'), 손옥주(이하’), 홍정아(이하')

손: 어떤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커뮤니케이티브’하다는 믿음이 있지만 그분의 실제 춤을 보면 커뮤니케이티브하다는 것, 소통의 의미 자체에 대해 되묻게 돼요. 마지막에 나오는 공연 모습을 보면, 사실 그 춤에 대해 한국춤이라고 하든 아프리칸 댄스라고 하든 재즈댄스라고 하든, 어느 것이라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의상, 악기 연주 방식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보면서 굉장히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이념화된, 표상화된 어떤 것들이 계속해서 실제 공연과 춤을 추는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그 불일치하는 지점이 되게 재미있고 흥미로웠어요. 철저하게 말을 통해 정제된 그분의 생각이 전달되었던 인터뷰 때와는 달리, 영상 속에 나타나는 연습 장면이나 공연 장면은 정말로 다이나믹하더라고요.



임: 갑자기 연결되는 게 예전에 가야무용단과 얘기할 때 ‘우리춤은 오리지널이잖아요’ 이렇게 얘기를 하셨거든요. 그런데 연습을 보면 그분들이 말하는 오리지널 춤이라는 게 계속 미끄러져나가는 현상이 보이잖아요. 본인들이 인식한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 같아요. 특히 이분은 북한까지 가셔서 이념적으로 완전히 교육을 받은 분이시잖아요.



손: 가야무용단 선생님들과의 인상적인 차이점 하나는, 조혜미 선생님의 경우 그런 말씀하시잖아요, 한국춤을 배웠을 당시에 임이조 선생님이 오셨고 송화영 선생님이셨나요, 그분이 그때 가르쳐주러 오셨다고. 거슬러 올라가서 이매방 선생님에 대해서도 언급하셨고, 최승희 선생님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죠. 그리고 그분들의 춤이 사실은 하이브리드하다는 걸 알고 계셨잖아요. 가령 임이조 선생님의 동작 문법에서는 발레라든지 그런 테크닉들이 나오고 이매방 선생님 말씀하실 때는 일본춤, 중국춤, 스패니쉬 댄스 이런 것도 말씀하시고. 그러니까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뭐랄까, 아주 퓨어한 한국춤이란 게 사실은 없다는 것을 하나의 전제로 삼고 계시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바로 그 점이 가야무용단 선생님들과의 차이점인 것 같긴 해요. 그런데 흥미로운건 조혜미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한국춤이 하이브리드한 춤이라는 걸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별개로 이상적인 한국춤의 이념이랄까 또는 한국적 정신에 대한 전제랄까, 그런 걸 갖고 계신 것 같다는 거죠.



임: 조혜미 선생님이 본인들은 항상 차별받고 억압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춤으로 표현해야 했는데 한국춤을 만났을 때 그냥 아름답다는 거 하나로 출 수 있었다는 것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말씀하시는데요. 동시에 한국춤의 전승 체계, 한국춤 문화의 요소 같은 걸 무시하고 가진 못하시더라고요. 제가 무용 동호회를 소개시켜 주실 수 있냐고 부탁을 드렸더니 두 가지 부류가 있대요. 한국에서 온 뉴커머에 의해 만들어진 무용단 또는 무용소는 한국 무용계의 사제지간의 위계 질서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재현이 되고 있더라고요. 그 무용교습소에 들어가게 되면 제자가 되고 그 류에 속하게 되는 거고. 춤에 대한 자유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는데 제도 또는 관계 때문에 아이러니한 부분이 생기는 것 같아요. 조혜미 씨도 그 뉴커머에 의해 만들어진 무용교습소에 가서 한국춤을 배우셨더라고요. 자유로운 춤, 아름다운 춤, 추고 싶은 춤과 선생님과의 관계, 위계질서 등을 상이하게 경험하셨고요. 뉴커머 선생님들의 경우는 어떤 판단이 선행하다 보니까 맞다 틀리다 식의 소통 때문에 그만두고 나가는 사람도 있고, 일본인의 경우 다시는 한국춤을 추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해요. 그런 게 한국보다 더 보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손: 그리고 스승, 전대의 스승, 그 전전대의 스승을 따라서 전승 체계 안에서 전해 내려온다는 한국춤에 대한 믿음과 그에 관한 실제 본인들의 경험이 있는 셈인데요. 그런데 그 맥락을 추적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일본인들과 만나지는 지점이 있는 거잖아요, 이시이 바쿠처럼. 한편으로는 일본에 굉장히 잘 동화돼 있는 동시에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민족적으로는 분리돼 있고 계속해서 배제돼 있는 그 어떤 경계적인 상태가, 계속해서 이분들의 생활이나 춤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특수성이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이것을 거슬러올라갔을 때 일본인 스승과 만나지는 지점, 그리고 그게 이들에게 어떻게 수용되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임: 조혜미 선생님 같은 경우 북한에서 조선춤을 먼저 배우시고 허리 다쳐서 못하게 되시면서 한국춤을 배우신 거잖아요. 그 춤이 가지고 있는 테크닉, 배경, 이념, 아이디어, 스토리나 감정이 다른데 조선춤을 추실 때와 한국춤을 추실 때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지 궁금해요. 신체적으로, 이념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이건 조선춤, 이건 한국춤 이렇게 구분이 되는지, 이걸 어떻게 넘나드시는지. 또는 어떻게 전환이 되는지. 조혜미 선생님과 대화할 때 이시이 바쿠에 대해서 얘기를 하셨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이 정통적인 전통을 배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더라고요. 본인이 한국춤이라고 배운 형식이 이미 일본 이시이 바쿠라는 최승희의 선생에 의해서 온 부분도 있고 최승희를 통해 한국에서 온 부분도 있고 이렇게 섞여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고.



손: 방금 얘기하신, 조혜미 씨가 하나의 몸으로 정말 조선무용과 한국무용을 마치 전혀 다른 두 장르처럼 인지를 하는 걸까, 또 그분한테 그 상이한 춤의 방식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며, 실제로 어떻게 수행되는 걸까 - 정아샘이 이메일로 공유해주신 질문에서도 그런 포인트를 짚어주셨잖아요. 싱겁다라든지 여백이랄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이분이 느끼는 그 차이가 정말로 그런 건지도 궁금했거든요. 정아샘이 보내주신 질문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아서 재미있었어요.



임: 너무 좋대요. 조선춤을 출 때는 항상 조총련계, 민단계 나뉘고 조선춤을 떠나 한국춤을 배울 때는 조선춤을 같이 췄던 동료나 선생님들한테 비난을 받았고, 항상 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국춤을 출 때는 그런 경계가 없어진다는 얘길 하시더라고요. 그 부분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홍: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듣고만 싶은 심정인데요. 영상 봤을 때도 질문 주고받을 때도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부분을 들으면서 북한에서 온 친구들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조선춤을 출 때 구분되는 것과 같이 한국에서 이등시민처럼 겪으면서 분리되고 구분되면서 살아가고 있잖아요. 제3의 국가를 가서 난민이 되기도 하고요. 서경식 선생님 책에서도 ‘돈 많은 사람은 기분 나쁘면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수 있지만 돈 없는 사람은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그냥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에서 살았고 친구도 가족도 여기 있기 때문에 그런 분리감과 구분됨이 있어도 그냥 견디고 척박한 땅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이런 표현을 하셨는데, ‘한국춤을 배울 때 경계가 없어서 자유함을 느낀다’는 게 저에게는 중요한 포인트로 느껴졌어요.

서경식 선생님이 원하시는 민족의 개념, 어떻게 보면 이데아 같은, 이 세상에 없는 개념일 수 있는데 ‘한국춤을 출 때 마치 내가 구분되어지고 경계되어지지 않는 듯한 자유함을 느낀다’- 라는 표현. 그리고 인터뷰에서 ‘춤을 출 때 좋은 것이 지면에 내 발로 설 수 있다'고, 그것도 아주 인상적이었거든요. 우리는 연구를 통해서 재일조선인으로서 조선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일본사회에서 혐오와 차별을 받아온 역사를 알고 있잖아요. 그분들이 어려서 그런 경험을 한다는 것이 이들로 하여금 자기가 발을 대고 있는 이 일본이라는 땅이 자기 땅이 아니라는 느낌, 그런 감각 속에서 춤을 춘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저도 옥주님이 ‘보고 읽은 거냐’고 질문하셨던 인터뷰 영상, 틀자마자 NG없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아 읽고 계시는구나 직감할 수 있었는데 글로 정리한 게 아니라 만나서 직접 인터뷰 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질문을 미리 드리더라도 즉흥적으로 하게 되는 답변이 있을 거잖아요.

저도 그런 부분이 혼란스러웠거든요 - 북한춤은 과거의 춤, 자신에게 지나간 춤, 예전에 어렸을 때 배운 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나는 한국춤을 추고 있어, 이런 느낌이, 스스로 어떻게 그것을 구분하고 있는 것일까, 머리로서가 아니라. 그게 너무 궁금했고 저도 선생님들처럼 재일조선인의 포지션에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갔으면 좋겠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나갔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저는 맨 처음부터 지금까지 동일한 생각은 우리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분들도 관점이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마음과 행동과 삶이 좀 열리면 좋겠다, 하는 거예요. 왜 넘어가지 못하는 걸까.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혜미 씨 영상 보면서 우리가 조금 더 연구를 깊이 들어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어요.



임: 금강산가극단 춤 레퍼토리 중에 재일조선인사회에서 레퍼토리화 돼서 부채춤이나 무당춤처럼 흔하게 추어지는 춤이 있나요?



홍: 아무래도 제일 흔하게 추어지는 춤은 북한에서도 유명한 쟁강춤 같아요. 금강산가극단의 춤을 제가 보러 갔을 때 가무악이 함께 있다 보니까 콩쿠르 작품처럼 3분, 5분 되게 짧아요. 그런데 DVD 한 개에 긴 레퍼토리도 하나 있었어요.



임: 저번에 가무악 형식을 띤 무용 동호회 공연 사진 공유 드렸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지도를 들고 추는 춤. 이걸 금강산가극단에서 췄다고 정아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홍: <우리는 하나> 아니에요? 통일 염원하는 레퍼토리.



임: 여기 ‘하나’라고 써있긴 하네요. 쟁강춤, 부채춤 이런 건 예술적인 춤이잖아요. 그런데 이건 뭔가 이념이 곁들여진 춤 같아서 레퍼토리화 되어 있다면 되게 흥미로울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사진은 그냥 춤 동호회고, 금강산가극단에서도 이걸 췄다고 하셔서 혹시 재일조선사회 무용에 레퍼토리화 돼있는 춤인가 싶어서.



홍: 금강산가극단에서 안무가가 작품 하나 만들면 그게 바로 전파되는 것 같아요. 논문 보니까 흥미로운 게 기동성을 중요시해서 3인조로 돌아다니고, 조선학교에서 소조 활동하고 일반인 동호회 활동하고, 시스템이 정말 잘 돼 있더라고요.



임: 프로무용수이자 지도자이자 엔터테이너이자, 많은 역할을 하더라구요.



손: 그런데 <우리는 하나>라는 작품이 레퍼토리화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재일조선인 기준에서 한국무용의 정전화된 레퍼토리 같은 부채춤, 초립동 등 몇몇 춤들이 있잖아요. 그 정도로 정치적 상황이든 어떤 상황의 변화에 영향 받지 않고 언제나 공연 가능한 방식의 레퍼토리는 아니지 않을까 싶거든요. 아무래도 정치적인 색채를 띠다 보니 공연이 불가능한 상황들이 있을 수 있고 정치적 무드에 따라 때로는 전면에 내세워서 거의 하이라이트처럼 터뜨리는 이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작품이 레퍼토리화 될 수 있는지의 여부, 거기에 더해서 그 작품의 역할도 궁금하더라고요. 전통을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 작품만이 갖는 특유의 메시지나 역할이 있을 것 같거든요.



홍: 논문에서도 그런 것들이 언급되잖아요. 북한의 경우 선전용이 많겠지만 그것도 가져오고, 거기에 더해서 금강산가극단의 주제 자체가 재일조선인들의 고난, 통일, 염원 등의 주제로 좁혀지는 것 같아요.



임: 가장 흥미로웠던 건 조선춤과 한국춤의 유입인데요. 조선춤은 거의 국가, 민족, 집단 정체성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면 한국춤은 스승 체제로 이뤄지는 게 굉장히 흥미로웠고요. 조선춤의 경우 자이니치라는 이방인, 소수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고, 한국춤의 경우는 스승제자의 위계적인 체계가 있긴 하지만 한국무용가, 예술가로서 자아실현 같은 것이 가능했다고요. 전문 무용가, 예술가로 나갈 수 있는 배경이 되는 거죠.



손: 저는 동시에 아주 변증법적으로 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정반합으로. 북한춤을 추는 데 있어서 자유가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을까 싶기도 하고요. 반대로 한국춤을 배우는 데 있어서는 아까 말씀하셨듯 한국 출신의 뉴커머들이 오면서 어떤 면에서는 자신들이 경험해왔던의 독자적이고 보수적인 교습 체계를 이식해놓는 거잖아요. 거기서 나오는 굉장한 권위주의와 여러 답답한 면들이 있을 텐데, 그런 현실적인 맥락은 지워진 상태로 소위 남한의 한국무용은 자유를 지향한다거나 여백이 그 안에서 느껴지거나 한다는 감상만이 남는 게 - 물론 춤을 배우고 수행할 때, 춤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다를 순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동시에 이 둘은 상극을 이뤄야 된다는 게 이미 이념적으로 전제가 되어있진 않을까? 그렇게 이념화된 마인드 안에서 자신들의 춤이 수행되는 방식이나 본인들이 느끼는 호흡의 문제 같은 것이 이념의 영향을 받아서 그것이 몸에도 영향을 주고 몸으로 수행하는 춤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그런 어떤 변증법적 모델의 방식이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춤을 배울 때 여러 경계를 느끼지만 한국무용 배울 때는 그 경계가 모두 사라지고 그 안에서 자유의 공간, 답답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건 사상적인 부분과 상통하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되거든요. 정치적, 이념적, 또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 이런 방식의 이념적 이해와 접근이 이들의 심상 속에 상극화된 모델을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싶었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들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함과 동시에 속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는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특이한 방식의 합을 만들어낸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본인들이 의도했건 아니건. 그들의 춤이 그걸 말해준다고 생각해요. 그들의 춤도 그렇고 그들이 구사하는 한국어도 그렇고.



임: 조혜미씨 얘기를 들어보면서 허리가 끊어질 때까지 춤을 추고 북한에서 배울 때 무용단에서 자기를 가르쳤던 선배 언니가 정말 토할 때까지 추고 쉬는 시간에는 쥐죽은 듯이 누워있었다고 하시잖아요. 그런데 보면, 북한춤은 빠르고 다이나믹하잖아요. 리듬도 움직임도 모든 게 압축돼 있고요.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춤에 그러한 다이나믹이 부재하는 것이 조혜미씨에게는 여백인 건지, 아니면 어떤 이념적인 부분의 부재를 여백으로 느끼시는건지도 궁금하고. 그리고 북한춤은 왜 항상 리듬, 다이나믹, 모든 것이 몰아치는지, 개인의 생각을 집어넣을 공간을 처음부터 배제하는 건지. 왜 그렇게 빠르고 다이나믹할까요?



홍: 제가 지난번 프로젝트 때 탈북하신 선생님한테 최승희의 북한 기본춤을 배웠어요. 그리고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처음에 최승희가 북한에 가게 된 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북한에서 예술가로 살 수 있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고, 그래서 초반에는 북한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기본춤도 만들고 악기도 개량하고 외국도 다니면서 활동을 하다가 남편 안막이 숙청이 된 이후에 최승희도 숙청당했다.’

‘김일성의 자서전 같은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최승희에 대한 안 좋은 평가들이 나오는데, 예술가로서 최승희를 인정했던 것을 한번에 바꾸고 숙청을 시켜야 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변질되었다는 쪽으로 끌고 갔고, 최승희가 추구했던 소품을 이용한 춤이나, 최승희가 독자적으로 구축한 예술성의 반대로 갔다. 최승희가 북한에 가서는 오히려 더 한국적인 것을 더 많이 찾게 되고 스스로 정리하고 만들어 나갔는데, 주체사상의 내용을 작품에 넣도록 강요해서 김일성과 싸웠다’라는 말씀해 주셨어요.



임: 최승희가요?



홍: 네, 최승희는 예술을 펼치고 싶은데 예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에 대해 반발이 심하게 있었고, 최승희가 숙청 된 이후로는 춤의 양식이 사상적으로 변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생각하지 않고 출 수 있는 춤, 기예적인 춤으로 변질되었다는 설명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임: 조혜미씨가 느끼는 여백이 두 개 다일 수 있겠죠. 신체적인 여백도 있겠고 정신적인 여백도 있겠고.



손: 한국춤의 여백이라는 것이, 호흡이나 장단을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제일 큰 비중을 두는 부분은 춤이 만들어내는 어떤 물리적인 부분이랄까요. 스피드나 다이나믹, 피규어 - 즉 형상 만드는, 이런 부분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어느 정도의 여백을 만들어내는지의  척도를 그런 기준으로 판단하시는 것 같았어요.

계속해서 궁금했던 게, 호흡과 장단에 있어서 내면의 것을 외면화하는 게 중요한데 그게 제대로 됐을 때는 너무 기쁘다고 인터뷰에서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호흡과 장단을 모르겠는 거예요. 저한테는 그것도 굉장히 피지컬한 요소로 느껴지거든요. 호흡과 장단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계신 건지 궁금하더라고요.



임: 그래서 순서는 기억해도 선생님이 가시고 나면 호흡은 기억할 수 없으므로 그 부분을 본인이 해결해서 추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하시잖아요. 여기 논문에서도 얘기했듯이 재일조선인의 독자적인 문화가 그냥 동화되어 버리거나 그들의 춤이 원본과 아류의 이분법에 놓이고  거기서 또다시 인사이드 아웃사이드가 나뉘게 되는데요. 뭐랄까 항상 그런 의심이 있는 것 같아요, 본인이 오리지널리티를 재현하고 있는건지. 선생님이 부재한 상황에서 순서는 기억해도 호흡은 기억할 수 없으니 이분한테는 이게 진짜 춤이 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나는 창작적인 걸 가미해서 내 춤을 춘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가야무용단 선생님들도 보면 선생님들이 가르치고 가면 까먹잖아요.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 넣는 행위가 창작이 이루어지는  지점인데 이 경우도 비슷하지 않은가 싶어요.



손: 그런 점에서 임이조 선생님이든 누구든 오리지널, 혹은 ‘어쎈틱’ 인물이라고 상정되는 분들의 몸과 춤이 이분에게는 교본이 아닐까 해요. 살아서 움직이는 몸임에도 그것 자체가 레퍼런스이고 교본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교본이 물리적으로 내가 캡쳐할 수 있는 거리에 있지 않으면 내가 이 춤을 완벽하게 기억해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랄까, 그런 것들이 좀 느껴진 것 같아요.



임: 그 부분은 한국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을 강조하며 가르쳤기 때문에 선생님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그 두려움이 올 수 있을 것 같고 본인이 오리지널을 제대로 추고 있지 않다, 선생님이 없는 한 나는 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홍: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항상 한국춤 이야기할 때 호흡을 강조하고 이분들이 춤을 빨리 추 다 보니까 느리게 추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들더라고요. 한국춤의 호흡이 중요하다는 교육도 받았고 여기서 1초면 갈 수 있는 사람이 10초동안 가라고 하니까 어떻게 가야 될지 모르면서 가는데, 혹시 직진으로 가야 하는데 옆으로 샐까봐 두려워서 제대로 가지 못하는, 그런 느낌도 들었던 것 같아요.



임: 그런데 그 질문을 반대로 조선춤에는 하지 않는다는 거죠. 조선춤도 이분들이 일본에서 배울 때는 교본이나 비디오로 배웠다고 나와있더라고요. 물론 직접 가기도 했고, 선상 지도도 있었고. 그런데 한국춤에 던지는 질문을 조선춤에는 던지지 않는 거죠. 조선춤은 배워서 익힐 수 있는, 순서로 재연할 수 있는 춤이어서 그런가요?



손: 조혜미씨 말씀 중에 그게 있었잖아요, ‘선생님을 스캔하듯이.’ 전 그 표현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선생님을 스캔한다는 게 도대체 어떤 감각일지.



임: 그리고 선생님을 스캔한다는 게, 나중엔 제 몸을 스캔하기도 해요. 한국춤을 출 때는 거울 없이 못 추거든요, 특히 신무용은요. 거울 보면서 추는 게 항상 내 몸을 스캔하는 거예요. 항상 컨트롤하고.



홍: 저는 일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거든요. 여행 갔을 때 어느 정도 알게 된 것, 그리고 일본 친구들도 오래 교제했다기보다 지나가다 한번씩 보는 친구들과의 경험이 전부라서 일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책에서 본 것 외에 접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일본문화에 대한 궁금함도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그분은 문화적으로 일본과도 가깝고 북한과도 가깝잖아요. 일본 땅에서 살았고 학교에 가면 북한 교육을 받고 북한에서 교육받은 선생님이 날 교육하는 거고요. 부모님이 조선학교를 나왔고 자신의 자식도 조선학교를 보내고. 이런 식으로 일본내에서 소수민족처럼 살고 있는데 제가 일본 문화, 일본 사람을 모르겠다고 하는 감각처럼 한국 사람에 대해서 그런 게 있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한국춤을 배울 때 뭔가 자신이 없어지는 게, 춤 자체도 자신이 경험한 북한춤과 완전히 반대가 되고. 북한의 조선춤을 배웠을 때는 뭔가 눈에 보이고, 직접 북한에도 갈 수 있고, DVD도 있고, 조선학교 선생님이 직접 가르치고 같이 호흡하면서 커왔는데 한국사람은 한번 만났다가 헤어지면 잘 모르겠는 그런 상황에서, 한국 문화를 모른다는 불안함에서 두려움이 더 오는 게 아닐까.



손: 그 차이는 있을 것 같아요. 방금 정아샘의 말씀과도 맞닿을 수 있는데, 이분의 생각에는 한국춤 원형은 북한의 조선무용이 아니라 남한의 한국무용인 거예요. 그건 아주 분명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자기 자신의 춤의 뿌리, 자기 자신의 춤의 시초는 북한식 춤인 거잖아요. 본인이 가장 오래 했던 춤이니까요. 그래서 계속 본인에게 북한춤은 노스탤지어의 대상인 거죠.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진짜 뿌리를 알기 위해서는 이 한국무용을 배워야 할 것 같고. 이분에게 있어 한국춤의 원형이란 무엇일까, 오리지널리티란 무엇일까, 어떤 걸 어떤 방식으로 감각하고 있는 걸까 질문이 들었어요.?



홍: 조혜미님이 북한춤과 한국춤은 결국엔 같은 뿌리다, 그런 표현을 하셨더라고요. 김일성이 원했던 것은 북한의 시작을 알리는 북한만의 오리지널한 춤이었는데, 결국 우리 얘기에서 재일조선인 분이 얘기한 건 ‘결국 뿌리는 하나다.’ 원형에 대한 얘기가 굉장히 복잡한 거 같아요. 고대부터 인도, 중국 영향을 받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춤이 혼종적으로 변화 발전해서 조선시대로 이어졌어요. 그리고 식민지배를 당하다 보니 춤도 일본인에게 배우게 되는 등의 역사적인 부분이 있고, 그래서 이런 디아스포라들이 파생이 됐고요. 그 중에서도 식민지배를 했던 나라에 남은 사람들의 어려움은 더 독특한 어떤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걸 지켜내야 되고, 돌아가야 되고,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살아남아야 되고,



임: 그런데 저는 한국춤이라고 하면 전통춤이 연결되거든요. 신무용도 있고 한국창작춤도 있지만. 그렇다면 조혜미씨에게 조선춤이라고 하면 전통춤이 아닌 건가요? 조선에 전통이 없다고 하면.



임: 낡은 건 다 없애고 새로운 걸 만들어야 된다, 그럼 조혜미씨가 생각하는 조선춤은 전통이 아닌 거죠.



홍: 네. 북한이 시작된 시점으로부터의 춤이죠. 당시 북한이 시작된 시기에 파생된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임: 전통이나 창작 같은 개념이 아예 부재한 거네요.



홍: 네. 전통이라고 하면 오래되고, 낡고, 되게 나쁜 것처럼 여긴다고 하더라고요.



손: 예전부터 항상 그게 궁금했는데요. 우리나라도 문화재보호법이 생겨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필드 리서치를 통해 예인을 불러모으는 과정이 있었지만 북한에도 분명 황해도면 황해도, 함흥이면 함흥, 각 지역의 옛 춤문화들이 있었을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부분들이 발굴되거나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게 없을까요. 북한에서도 그런 옛 문화 발굴의 필요성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과 달리 북한은 방금 홍정아 선생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일로부터 시작된다는 이념 하에 과거의 것들이 그냥 그 이념 안에 묻혀버리는 상황으로 전개됐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동시에, 전통춤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전통을 우리가 문화적으로 이해하거나 다시 한번 생각하고 맥락화해야 한다는 요청 자체가 거의 금기시된 사회가 북한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그 춤에는 시간성이 배제되어 있겠구나, 시간성이 배제된 춤이 북한춤인 걸까, 그런 질문도 들었어요. 공산당의 홍보용, 선전용으로 만든 의상, 무대 장식 같은 것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정말 그런 류의 무용 작품들이 북한 선전 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철저하게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무용이 또 다른 축을 이루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런 상황 속에서 사실상 이 춤의 전승과 관련한 역사성은 배제가 되겠구나 싶어요. 하지만 그게 정치적, 이념적인 이유로 배제된다 하더라도, 춤이 역사성을 갖지 않을 수가 있나요? 춤이 역사적이지 않을 수가 있나요? 그런 질문이 문득 들어요.



임: 전통이 없다면 창작에 대한 개념도 없잖아요. 그런가요? 그렇죠, 전통이 없으면 본인들이 여기서 이 형식을 깨고 – 아, 있겠네요. 아니, 있나요? 창작이라는 개념이 있을까요?



홍: 그게 지금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 같아요. 저도 어려워요. 남한에서는 북한춤은 예술이 아니다, 프로파간다용이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저의 입장은 선전용이라 할지라도 그걸 우리가 계속 연구해야 되고 그 안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춤을 추는지, 그 움직이는 몸이 어떤 걸 담아내고 있는지 연구해야 된다는 건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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