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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詩
먼 곳으로부터 온 / 어떤 국적 / 혹은 어떤 인척과 친족관계 / 어떤 혈연 / 어떤 피와 피의 연결 / 어떤 조상 / 어떤 인종 세대 / 어떤 가문 종친 부족 가계 부류 / 어떤 혈통 계통 / 어떤 종(種) 분파 성별 종과 카스트 / 어떤 마구 튀어나와 잘못 놓여진 /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부류 / Tombe des nues de naturalized / 어떤 버려져야 할 이주(移住)1
흐르다
춤은 흐른다. 어디선가 흘러왔고, 어디론가 흘러간다. 서로 다른 시간을, 인종을, 문화를, 정치사회적 맥락을 경유해온 춤은 지금, 이곳에서 춤추는 몸의 관성을 동력삼아 모세혈관처럼 퍼져 나간다. 단지 흐름만이 유효하다. 흐르는 춤은 역사적 함의의 투명한 전달을 전제하지도, 의도하지도 않는다. 비록 춤추는 몸이 그것을 의식하거나 의지할지라도 정작 춤은 의미의 수렴 지점으로부터 빠져나와 특정 몸의 생태계 내에서 부지불식간에 변주됨으로써 다시 어딘가를 향해 이동한다. 나아감에 있어 방향 설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놓인 서로 다른 몸들이 춤을 매개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와 같은 흐름에는 어떠한 내적/외적 개입이 있고, 망설임이 있고, 중얼거림(murmur)이 있다. 개인’들’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로서의 춤. 춤추는 몸들을 선형적 배열의 대상으로 삼는 통시적 흐름과는 다른, 어긋남의 상태 그 자체만을 필연적인 도달점으로 삼는 불투명한 춤. 안무가 임지애의 이번 작품 <흐르는 춤>은 어디선가 흘러왔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춤의 생리(生理)에 주목하는 동시에 특별히 춤의 출처와 이동경로에 ( )를 침으로써 특정 춤 레퍼토리에 덧입혀진 상식적•보편적 인상을 실제 몸에 각인된 부정형(不定形)의 시간성으로 치환해낸다. 그와 같은 치환의 프로세스 안에서 춤은 비로소 ‘번역’된다.
다리아 지애 지애 경수 다리아 경수
형식적인 면에서 보자면, <흐르는 춤>은 세 퍼포머(다리아 포촌택과 임지애와 신-놀테 경수)가 수행하는 부채춤이 춤에 대한 기억의 발화와 더불어 개별적으로 혹은 서로 겹쳐진 채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렉쳐 퍼포먼스의 형식을 취하는 듯하다. 그러나 춤과 관련된 일회적 사건 등 퍼포머 각자의 뇌리에 저장된 기억의 단편을 춤의 재료로 삼는 한편, 타인의 기억을 체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춤 또한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말’은 말의 의미에 대한 ‘읽기(reading)’를 전제하는 일반적인 렉쳐 개념 너머에 있다. 그런 점에서 <흐르는 춤>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며, 흐르는 듯 분절되는 세 퍼포머의 육성을 통해 감각되는 바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전에 ‘어떻게 말하는가’, 그리고 ‘말은 춤으로부터 어떻게 분리되며, 역으로 춤은 말을 통해 어떻게 낯설어지는가’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말의 형식을 빌어 발산되는 언어란 빙의(possession)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떠한 이행상태(transition)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다리아가 유튜브 영상을 레퍼런스 삼아 창작된 해어화의 춤을 재해석할 때, 지애가 메리 조의 몸과 춤을 통과할 때, 경수가 수십 년간 활동해온 가야무용단의 춤을 기억할 때, 그들이 시시각각 수행하는 ‘춤’과 ‘말하기’란 서로 다른 시간성 혹은 서로 다른 춤과 몸의 혼종(hybridity)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상태’는 오히려 차이의 공존(coexistence)에 가깝다. 서로가 서로를 낯설게 함으로써, 또한 그처럼 팽배해진 낯섦 안에서 차이를 발생시킴으로써 그(것)들은 비로소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흐르는 춤>의 소재이기도 한 ‘부채춤’이 수행되는 양상 또한 이 같은 방식의 공존을 암시한다. 만약 이번 작품의 의미에 대해 ‘한국 신무용의 대표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인 부채춤을 한국춤 전공자인 전문무용수와 취미로 한국춤을 익힌 비전문무용수가 각각 추어본다’ 정도로 예측하거나 이해한다면, 그러한 예측과 이해의 근원에는 ‘춤추는 주체가 부채춤의 이상을 끊임없이 지향함으로써 결국 부채춤이 습득 가능한 그 무엇이 될 것이라는 상상’이 놓여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은 곧 부채춤의 원전성(authenticity)에 대한 호출과 더불어 균질적인 비교의 기준과 시선을 가능케하는데, 정작 작품에 등장하는 퍼포머들의 춤추는 몸은 그와 같은 상상을 방해하는 무대 위 현존재로 출현함으로써 각자의 춤을 선험적인 동시에 투명하고도 선형적인 그 무엇으로 대상화하려는 비교의 기제들을 역으로 드러낸다. 공존 불가능한 조건들이 춤추는 몸에 한데 모여 어떠한 공존의 상태를 구현해내는 것. 그와 같이 그 어떤 조건도 부정되거나 결여되지 않은 채 동시에 ‘차이’로서 구현된 상태 안에서야 비로소 다리아와 지애와 지애와 경수와 다리아와 경수의 춤은 흐른다.
춤의 번역
<흐르는 춤>을 직조해내는 공존이란 병치(juxtaposition)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독일어로 글을 쓰는 일본 출신의 작가 타와다 요코는 <번역가의 문(門) 또는 첼란이 일본어를 읽는다(Das Tor des Übersetzers oder Celan liest Japanisch)>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좋은’ 문학이란 사실상 번역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략) 하지만 일찍이 일본어 번역본을 통해 나를 감탄시켰던 파울 첼란의 시처럼 예외도 있다.”2 번역된 문학이 불러일으킨 감탄의 정체에 대해 자문하던 그녀는 어느 날 독일인 학자 뵈어만(Klaus-Rüdiger Wöhrmann)과의 전화 통화를 계기로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閾から閾へ)≫라는 제목이 부여된 첼란의 일본어판 시집에 등장한 한자 ‘문지방 역(閾)’의 부수인 ‘문 문(門)’자에 주목하게 된다.
부수란 표의문자(Ideogramm)의 주요 구성요소와도 같다. (중략) 문을 뜻하는 門자처럼 부수로만 구성된 표의문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추가적인 구성요소를 갖춘다. ‘문 문’자를 부수로 삼는 모든 한자는 의미상 문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때론 부수가 지니는 뜻과 [역자 추가: 부수를 포함한] 전체 한자의 뜻이 사전의 도움 없이는 맥락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 밖에도 글을 읽을 때는 누구나 하나의 글자를 이루는 각각의 구성요소가 각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에 하나의 글자를 전체로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나로서는 혼자 힘으로 첼란 시집의 부수에 대한 생각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외부에서 주어진 명확한 시선만이 나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할 수 있었다.3
작가의 주의를 사로잡은 한자 부수(Radikal)란 형식적으로는 한자의 한 부분을 이루되, 의미적으로는 자신이 부분이자 모태를 이루는 바로 그 한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자신을 부수로 취하는 한자와 친화적이면서도 낯선 관계를 형성한다. 이처럼 복수의 문자들이 동시에 병치되어 최종적으로 또 하나의 문자를 파생시키는 한자의 특성과 그에 기인한 문자 간의 이중적 관계에 대한 고찰은 그 자체로 ‘번역(Übersetzung)’ 매커니즘의 특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발터 벤야민은 「번역가의 과제(Die Aufgabe des Übersetzers)」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언어에 있어서의 유사성(Ähnlichkeit)과 친화성(Verwandtschaft)을 구분한 바 있는데 전자가 원본(Original)과 그에 대한 모사(Nachbildung) 간에 발생되는 의미 전달에 국한되는 반면, 후자는 두 언어의 개별적 요소가 상응하는 양상에 주목하는 대신 두 언어가 분리(Trennung)되어 있기에 발생가능한 둘 사이의 상호관계성에 주목한다.4 벤야민이 제시하는 개념의 차이를 통해 감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의미전달이라는 단일한 목적 하에서 이루어지는 번역이란 언어 간에 발생되는 차이의 지점들을 극대화된 동일성의 온도로 녹여내는 용광로(melting pot)와도 같다는 점이다. 동일성의 끓는점에 이르러 결국 ‘언어의 신체성을 이루는 리듬, 생기, 뉘앙스 등의 요소들’, 그리고 ‘이해의 망에 포섭될 수 없는 어떠한 번역가능성’은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상태, 즉 ‘의미’라는 이름의 상태 안에 용해되어버리는 것이다. 반면 ‘분리 되어있음’이라는 상태는 필연적으로 차이의 공존을 전제함으로써 그와 같은 공존 상태에서 무한히 반복되며 발생할 수 있는 번역의 연쇄를 긍정한다. 문예학자 사카이 나오키는 자신의 저서 『번역과 주체(Translation and Subjectivity)』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번역에 대한 자신의 사고 습관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번역을 단지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로 변환되어 두 개의 언어나 두 개의 집단이라는 이항관계 속에서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제 3항, 제 4항으로 무한히 증식해가는 연쇄로서 생각하는 버릇 같은 것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소통모델로 번역을 생각하는 것에 내가 순응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것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략) 번역의 번역의 번역 …… (후략)5
그가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폐쇄영역으로 표상된 언어와 다른 자기완결적인 폐쇄영역으로 표상된 언어 사이의 의미교환”으로서가 아닌, “사람들이 ‘타자’에게 열려 있다는 것, 즉 사람들의 사회성의 행위”6 로서 번역을 ‘감각’할 때, 번역이란 그 자체로 이주의 행위와 공명한다. 즉, 흐른다. 심지어 이처럼 나와 타자(성), 즉 나와 내가 아닌 상태가 공존하는 순간에 비로소 발생되는 흐름이란 부수를 포함하되 부수와의 관계는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한자의 형성 매커니즘과 닮아 있는 동시에 벤야민식 친화성의 상징 또한 획득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종국에는 주체 내부의 타자를 발견하게/도모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마치 사카이가 자신의 책에서 적절히 인용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표현에서처럼 말이다: “자기 언어와 다른 언어를 할 때 뿐만 아니라 자기 언어 속에서도 외국인 되기. 방언이나 사투리도 없이 하나의 동일한 언어 속에서 두 언어나 다언어 사용자 되기.”7
그렇다면 <흐르는 춤>의 경우에서처럼, 주체와 주체 외부의 병치 상태가 각각의 춤추는 몸을 매개로 서로 다른 몸의 공존, 서로 다른 시공간의 공존, 서로 다른 기억의 공존 등의 양상으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춤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각자의 몸에 기입된(inscribed) 움직임의 결들을 겹겹이 떼어내어 춤의 복수성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복수성을 다시금 무대 위에서 펼치는 라이브 퍼포먼스의 형식 안에 옮겨 놓는 것. 그런 점에서 세 퍼포머가 공통적으로 구현해내는 ‘부채춤’이라는 특정 춤의 형식, 그리고 다름으로써 같은 그들의 부채춤이 공통적으로 건네는 질문, 즉 ‘춤의 복수성을 어떻게 무대 언어로 옮기는가’에 대한 질문은 <흐르는 춤>의 부수를 이룬다.
Epilogue
번역에의 고찰을 경유함으로써 춤에 다가가고자 하는 필자의 시선은 <흐르는 춤>의 창작 여정에 동행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획득된 것이다. 현재 예술계에서 통용되는 ‘번역’이라는 용어는 의미상 ‘타 매체로의 전환 혹은 서로 다른 매체 간의 해석’ 정도에 머무는 경우가 많은 반면, 이번 <흐르는 춤>에서는 언어 번역의 과정 중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세 퍼포머의 춤추는 몸을 통해 발현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상술했듯이 이번 작품에서 유일하게 소재로 등장하는 춤 형식은 ‘부채춤’이다. 그러나 정작 퍼포머들이 실제 소재로 취하는 부채춤의 양상은 직접 배운 부채춤, 보고 배운 부채춤, 보기 좋은 부채춤, 김백봉류 부채춤, 대학입시형 부채춤, 상상하며 자가습득한 부채춤, 유튜브를 통해 배운 부채춤, 사진 이미지를 보고 따라서 춘 부채춤, 형태 만들기형 부채춤, 공동창작으로 만들어낸 부채춤, 타인이 춘 부채춤 등 매우 다양하다. 이 같은 복수형의 부채춤’들’은 정전화된 춤의 계보에서 이탈해 있는 바로 그 상태로부터 부채춤의 ‘번역가능성(Übersetzbarkeit)’을 직조해낸다. ‘부채춤’에서부터 시작하되 ‘부채춤’이라는 표상에 포섭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끊임없이 이주해야만 ‘부채춤’의 실제에 이를 수 있다는 역설. 그와 같은 역설 안에서야 춤은, 비로소, 흐른다.
Dance as Translation (Tanz als Übersetzung)
- Reflections on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Son Okju (Performing arts scholar)
Translation: Kyunghoo Kathy LEE
Prologue
From A Far / What nationality / or what kindred and relation / what blood relation / what blood ties of blood / what ancestry / what race generation / what house clan tribe stock strain / what lineage extraction / what breed sect gender denomination caste / what stray ejection misplaced / Tertium Quid neither one thing nor the other / Tombe des nues de naturalized / what transplant to dispel upon1[1]
To Go
Dance goes. It has come from somewhere and it goes to somewhere. Dance, after having gone by way of different times, races, cultures, and socio-political contexts, spreads like capillaries, powered by inertia of bodies that are dancing here and now. The only thing valid is the going. Dance that is going somewhere does not presume or intend a transparent delivery of historical implications. Even though a dancing body might be conscious of or dependent on it, dance simply moves somewhere again, departing from where meaning converges to and unwittingly going through variations within a particular body’s ecosystem. Not being able to set a direction of its progression betrays the fact that different bodies in unpredictable states are mediating dance. In such a dance are internal/external interventions, and also hesitation and murmurs. Dance as a state of overlapping times of different individuals. An opaque dance which, unlike a diachronic flow that regards dancing bodies as objects for a linear alignment, takes a dislocated state as its only inevitable destination. By paying attention to the physiology of dance –coming from somewhere and going into somewhere– and bracketing the origins and routes of dance in particular in her new dance piece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choreographer Jee-Ae Lim transposes commonly understood and universal impressions layered onto a particular dance repertory into indefinite temporalities engrained in actual bodies. In such a process of transposition is dance “translated” at last.
Daria Jee-Ae Jee-Ae Kyong Soo Daria Kyong Soo
From a formal point of view, Dancing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seems to take the form of a lecture performance in that the Korean fan dance practiced by three performers(Daria Poczatek, Jee-Ae Lim, and Kyong Soo Shin-Nolte) unfold, individually or with an overlap, along with utterance of their memories of dance. While fragments of stored memory of each performer such as anecdotes about dance are clearly one material to the dance, however, the piece attempts at dance as a process of embodying another person’s memory; ‘words’ in this piece is placed beyond the common idea of lecture which presumes a ‘reading’ of the words’ meaning. In this sense, we can say what is sensed from the actual voices of the performers, which continue while on the verge of disconnection and become segmented with a tinge of flow, is less about ‘what is said’ but more about ‘how it is said’ and ‘how words are separated from dance and how dance is defamiliarized through words in turn.’ For the performers, therefore, the language emitted in the form of spoken words is something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possession and could probably be said to be a continuation of a certain state of transition. When Daria reinterprets Hae-Eo-Hwa Dance Group’s dance, created based on Youtube videos, when Jee-Ae passes through the body and dance of Mary Jo Freshley, and when Kyong Soo remembers the dance of Kaya Ensemble she has belonged to for decades, the ‘dance’ and ‘speaking’ that they practice each moment do not mean hybridity of differing temporalities or of different dances and bodies. Such a ‘state’ is actually closer to the coexistence of differences. They can coexist by defamiliarizing one another and by generating difference in the bulging unfamiliarity. Furthermore, the ways of how the Korean fan dance -subject of Dancing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is practiced also implies this way of coexisting. If you expect or understand that this piece is about ‘a professional dancer trained in Korean dance and non-professional dancers for whom it was a hobby perform one of the most popular repertories of Korean New Dance(Sinmuyong), which is fan dance,’ then perhaps what underlies such an expectation and understanding is the ‘imagination that fan dance would be ultimately something acquirable by dancing subjects’ seeking the ideal of fan dance.’ Such imagination invites criteria and perspectives for homogeneous comparison and summons the authenticity of fan dance; but the dancing bodies of performers emerge as Existence on stage that disturbs such imagination, inversely revealing mechanisms of comparison that try to objectify the dance of each one as something a priori and simultaneously transparent and linear. Conditions that are impossible to coexist gather in dancing bodies, materializing a certain state of coexistence. Only when no conditions are denied or absent but materialized as concurrent ‘differences’ do the dances of Daria and Jee-Ae, Jae-Ae and Kyong Soo, and Daria and Kyong Soo start to go somewhere.
Translation of Dance
The coexistence that weaves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also indicates the state of juxtaposition. Yoko Tawada, a Japanese writer who writes in German, raises the following question in her essay called ”The Gate of the Translator or Celan Reads Japanese(Das Tor des Übersetzers oder Celan liest Japanisch)”: “Some people argue that ’good’ literature is practically impossible to translate. (…) But there is an exception such as Paul Celan’s poetry, the Japanese translation of which has deeply impressed me early on.”2 She had been asking herself about the essence of this impression caused by translated literature when she talked to a German scholar Klaus-Rüdiger Wöhrmannon the phone, which led her to pay attention to the Chinese character ‘門(door)’ which is a radical(indexing component) of ‘閾(threshold)’ appearing in the Japanese title of the collection of Celan’s poems, From Threshold to Threshold(閾から閾へ).
A radical is a major component of ideograms. (…) There are ideograms only composed of one radical such as ‘門’ but usually they are accompanied by additional components. All Chinese characters with the radical ‘門’ are related to door in their meaning. Sometimes, however, the meaning of a radical and that of the whole character [which includes the radical – added by author] are so far from each other that the context is almost unrecognizable without the help of a dictionary. Also, when we read, we do not think about the meaning of each component of a character but register the character as a whole. Therefore, I would not have managed to think about a radical in Celan on my own. Only a precise way of seeing given from outside could lead me to think about it.3[iii]
A radical that captivated her attention forms a relationship of both affinity and unfamiliarity with the character it belongs to, in that it is a part of the character in terms of form yet its meaning could be directly relevant or irrelevant to the very character to which it is both a component and the source. This consideration in how Chinese characters stem from multiple characters being juxtaposed and how this results in double relationships between characters also represents, in itself, a characteristic in the mechanism of ‘translation(Übersetzung).’ In his thesis ‘The Task of the Translator(Die Aufgabe des Übersetzers),’ Walter Benjamin distinguished similarity(Ähnlichkeit) and kinship(Verwandtschaft) in language; while the former is limited to the communication of meaning that occurs between the original(Original) and its imitation(Nachbildung), the latter focuses, rather than how individual elements of two languages correspond to each other, on the interrelationship of the two which can arise because they are separate(Trennung).4 What we can notice from Benjamin’s distinction of concepts is that a translation under the single purpose of communication of meaning is like a melting pot which dissolves the spots of differences emerging between languages with a maximized temperature of sameness; at the boiling point of sameness, ‘elements that constitute the physicality of language - rhythms, vitality, or nuances’ and ‘certain translatability that cannot be captured in the network of understanding’ get dissolved in one indistinguishable state, that is, the state called ‘meaning.’ On the other hand, the state of ‘being separate’ inevitably presumes coexistence of differences, affirming a chain of translation that can arise, endlessly repeated, in such a condition of coexistence. Literary scholar Naoki Sakai once revealed his thinking habit in the foreword to the Korean translation of his book,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Because I somewhat had a habit of thinking that translation is not complete within the binary relation of two languages or two groups by simply converting a text to another text but it is rather a chain of endless multiplying leading to the third term, the fourth term, and so on. This may be one of the reasons why I could not adapt myself to seeing translation as a so-called communication model. (…) A translation of a translation of a translation…(…)5 [v]
When he ‘senses’ translation not as “an exchange of meaning between one language represented as a self-contained closed area and another language represented as a self-contained closed area” but as “an act of sociality of people – being open to ‘Others’”6, translation in itself resonates with –that is, goes somewhere with– the act of migration. Furthermore, a going that occurs at the moment when I and Other(ness), that is, I and a state of not being I, are coexisting resembles the mechanism of composing Chinese characters of incorporating a radical yet having an inevitably variable relationship to it and acquires a symbol of Benjaminian kinship at the same time; and further, it ultimately becomes an opportunity to discover/seek an Other within a subject as well. Just as Deleuze and Guattari’s words which Sakai aptly quoted in his book: “To be a foreigner, but in one’s own language, not only when speaking a language other than one’s own. To be bilingual, multilingual, but in one and the same language, without even a dialect or patois.”7[vii]
Then, when the juxtaposition of a subject and its exterior appears as coexistence of different bodies, of different space-times, or of different memories with the mediation of each dancing body, as in the case of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we might be able to say it is ‘translation of dance.’ To restore dance’s plurality by detaching each layer of movement inscribed in each individual body. And to transplant this plurality again in the form of live performance on stage. In this regard, the form of the Korean fan dance, a specific type of dance embodied by all three performers, and the question commonly posed by their fan dances -which are the same by being different-, in other words, the question about ‘how to transpose the plurality of dance into stage vocabularies’ are what constitutes the radical of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Epilogue
My approach to dance via the consideration of translation is something spontaneously acquired joining the creation process of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The term ‘translation’ commonly used in the arts scene usually means ‘transition into another medium or interpretation between different media’ but I found it interesting that the phenomena witnessed in the process of language translation are manifest through the dancing bodies of the three performers in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As mentioned above, the only dance form used as a material in this work is the Korean fan dance. The aspects of fan dance that the performers actually use as one, however, are very diverse: one that is learned firsthand; learned by watching; one that looks good; in Kim Baek-bong style; helpful for university entrance; self-taught by imagination; learned from Youtube; one that copies photographic images; one that is about making forms; created collectively; and one that is practiced by another person. These plural fan dances weave the translatability(Übersetzbarkeit) of fan dance out of the very state of deviating from the so-called authentic lineage of dance. The paradox of beginning from fan dance yet having to constantly slip and constantly migrate while not being captured by the representation of fan dance in order to reach the actuality of it. Only in such a paradox does dance begin to go somewhere, at last.
번역으로서의 춤 (Tanz als Übersetzung)
- <흐르는 춤>에 대한 소고 -
- <흐르는 춤>에 대한 소고 -
손 옥 주 (공연학자)
序詩
먼 곳으로부터 온 / 어떤 국적 / 혹은 어떤 인척과 친족관계 / 어떤 혈연 / 어떤 피와 피의 연결 / 어떤 조상 / 어떤 인종 세대 / 어떤 가문 종친 부족 가계 부류 / 어떤 혈통 계통 / 어떤 종(種) 분파 성별 종과 카스트 / 어떤 마구 튀어나와 잘못 놓여진 /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부류 / Tombe des nues de naturalized / 어떤 버려져야 할 이주(移住)1
흐르다
춤은 흐른다. 어디선가 흘러왔고, 어디론가 흘러간다. 서로 다른 시간을, 인종을, 문화를, 정치사회적 맥락을 경유해온 춤은 지금, 이곳에서 춤추는 몸의 관성을 동력삼아 모세혈관처럼 퍼져 나간다. 단지 흐름만이 유효하다. 흐르는 춤은 역사적 함의의 투명한 전달을 전제하지도, 의도하지도 않는다. 비록 춤추는 몸이 그것을 의식하거나 의지할지라도 정작 춤은 의미의 수렴 지점으로부터 빠져나와 특정 몸의 생태계 내에서 부지불식간에 변주됨으로써 다시 어딘가를 향해 이동한다. 나아감에 있어 방향 설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놓인 서로 다른 몸들이 춤을 매개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와 같은 흐름에는 어떠한 내적/외적 개입이 있고, 망설임이 있고, 중얼거림(murmur)이 있다. 개인’들’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로서의 춤. 춤추는 몸들을 선형적 배열의 대상으로 삼는 통시적 흐름과는 다른, 어긋남의 상태 그 자체만을 필연적인 도달점으로 삼는 불투명한 춤. 안무가 임지애의 이번 작품 <흐르는 춤>은 어디선가 흘러왔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춤의 생리(生理)에 주목하는 동시에 특별히 춤의 출처와 이동경로에 ( )를 침으로써 특정 춤 레퍼토리에 덧입혀진 상식적•보편적 인상을 실제 몸에 각인된 부정형(不定形)의 시간성으로 치환해낸다. 그와 같은 치환의 프로세스 안에서 춤은 비로소 ‘번역’된다.
다리아 지애 지애 경수 다리아 경수
형식적인 면에서 보자면, <흐르는 춤>은 세 퍼포머(다리아 포촌택과 임지애와 신-놀테 경수)가 수행하는 부채춤이 춤에 대한 기억의 발화와 더불어 개별적으로 혹은 서로 겹쳐진 채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렉쳐 퍼포먼스의 형식을 취하는 듯하다. 그러나 춤과 관련된 일회적 사건 등 퍼포머 각자의 뇌리에 저장된 기억의 단편을 춤의 재료로 삼는 한편, 타인의 기억을 체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춤 또한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말’은 말의 의미에 대한 ‘읽기(reading)’를 전제하는 일반적인 렉쳐 개념 너머에 있다. 그런 점에서 <흐르는 춤>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며, 흐르는 듯 분절되는 세 퍼포머의 육성을 통해 감각되는 바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전에 ‘어떻게 말하는가’, 그리고 ‘말은 춤으로부터 어떻게 분리되며, 역으로 춤은 말을 통해 어떻게 낯설어지는가’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말의 형식을 빌어 발산되는 언어란 빙의(possession)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떠한 이행상태(transition)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다리아가 유튜브 영상을 레퍼런스 삼아 창작된 해어화의 춤을 재해석할 때, 지애가 메리 조의 몸과 춤을 통과할 때, 경수가 수십 년간 활동해온 가야무용단의 춤을 기억할 때, 그들이 시시각각 수행하는 ‘춤’과 ‘말하기’란 서로 다른 시간성 혹은 서로 다른 춤과 몸의 혼종(hybridity)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상태’는 오히려 차이의 공존(coexistence)에 가깝다. 서로가 서로를 낯설게 함으로써, 또한 그처럼 팽배해진 낯섦 안에서 차이를 발생시킴으로써 그(것)들은 비로소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흐르는 춤>의 소재이기도 한 ‘부채춤’이 수행되는 양상 또한 이 같은 방식의 공존을 암시한다. 만약 이번 작품의 의미에 대해 ‘한국 신무용의 대표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인 부채춤을 한국춤 전공자인 전문무용수와 취미로 한국춤을 익힌 비전문무용수가 각각 추어본다’ 정도로 예측하거나 이해한다면, 그러한 예측과 이해의 근원에는 ‘춤추는 주체가 부채춤의 이상을 끊임없이 지향함으로써 결국 부채춤이 습득 가능한 그 무엇이 될 것이라는 상상’이 놓여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은 곧 부채춤의 원전성(authenticity)에 대한 호출과 더불어 균질적인 비교의 기준과 시선을 가능케하는데, 정작 작품에 등장하는 퍼포머들의 춤추는 몸은 그와 같은 상상을 방해하는 무대 위 현존재로 출현함으로써 각자의 춤을 선험적인 동시에 투명하고도 선형적인 그 무엇으로 대상화하려는 비교의 기제들을 역으로 드러낸다. 공존 불가능한 조건들이 춤추는 몸에 한데 모여 어떠한 공존의 상태를 구현해내는 것. 그와 같이 그 어떤 조건도 부정되거나 결여되지 않은 채 동시에 ‘차이’로서 구현된 상태 안에서야 비로소 다리아와 지애와 지애와 경수와 다리아와 경수의 춤은 흐른다.
춤의 번역
<흐르는 춤>을 직조해내는 공존이란 병치(juxtaposition)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독일어로 글을 쓰는 일본 출신의 작가 타와다 요코는 <번역가의 문(門) 또는 첼란이 일본어를 읽는다(Das Tor des Übersetzers oder Celan liest Japanisch)>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좋은’ 문학이란 사실상 번역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략) 하지만 일찍이 일본어 번역본을 통해 나를 감탄시켰던 파울 첼란의 시처럼 예외도 있다.”2 번역된 문학이 불러일으킨 감탄의 정체에 대해 자문하던 그녀는 어느 날 독일인 학자 뵈어만(Klaus-Rüdiger Wöhrmann)과의 전화 통화를 계기로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閾から閾へ)≫라는 제목이 부여된 첼란의 일본어판 시집에 등장한 한자 ‘문지방 역(閾)’의 부수인 ‘문 문(門)’자에 주목하게 된다.
부수란 표의문자(Ideogramm)의 주요 구성요소와도 같다. (중략) 문을 뜻하는 門자처럼 부수로만 구성된 표의문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추가적인 구성요소를 갖춘다. ‘문 문’자를 부수로 삼는 모든 한자는 의미상 문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때론 부수가 지니는 뜻과 [역자 추가: 부수를 포함한] 전체 한자의 뜻이 사전의 도움 없이는 맥락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 밖에도 글을 읽을 때는 누구나 하나의 글자를 이루는 각각의 구성요소가 각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에 하나의 글자를 전체로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나로서는 혼자 힘으로 첼란 시집의 부수에 대한 생각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외부에서 주어진 명확한 시선만이 나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할 수 있었다.3
작가의 주의를 사로잡은 한자 부수(Radikal)란 형식적으로는 한자의 한 부분을 이루되, 의미적으로는 자신이 부분이자 모태를 이루는 바로 그 한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자신을 부수로 취하는 한자와 친화적이면서도 낯선 관계를 형성한다. 이처럼 복수의 문자들이 동시에 병치되어 최종적으로 또 하나의 문자를 파생시키는 한자의 특성과 그에 기인한 문자 간의 이중적 관계에 대한 고찰은 그 자체로 ‘번역(Übersetzung)’ 매커니즘의 특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발터 벤야민은 「번역가의 과제(Die Aufgabe des Übersetzers)」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언어에 있어서의 유사성(Ähnlichkeit)과 친화성(Verwandtschaft)을 구분한 바 있는데 전자가 원본(Original)과 그에 대한 모사(Nachbildung) 간에 발생되는 의미 전달에 국한되는 반면, 후자는 두 언어의 개별적 요소가 상응하는 양상에 주목하는 대신 두 언어가 분리(Trennung)되어 있기에 발생가능한 둘 사이의 상호관계성에 주목한다.4 벤야민이 제시하는 개념의 차이를 통해 감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의미전달이라는 단일한 목적 하에서 이루어지는 번역이란 언어 간에 발생되는 차이의 지점들을 극대화된 동일성의 온도로 녹여내는 용광로(melting pot)와도 같다는 점이다. 동일성의 끓는점에 이르러 결국 ‘언어의 신체성을 이루는 리듬, 생기, 뉘앙스 등의 요소들’, 그리고 ‘이해의 망에 포섭될 수 없는 어떠한 번역가능성’은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상태, 즉 ‘의미’라는 이름의 상태 안에 용해되어버리는 것이다. 반면 ‘분리 되어있음’이라는 상태는 필연적으로 차이의 공존을 전제함으로써 그와 같은 공존 상태에서 무한히 반복되며 발생할 수 있는 번역의 연쇄를 긍정한다. 문예학자 사카이 나오키는 자신의 저서 『번역과 주체(Translation and Subjectivity)』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번역에 대한 자신의 사고 습관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번역을 단지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로 변환되어 두 개의 언어나 두 개의 집단이라는 이항관계 속에서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제 3항, 제 4항으로 무한히 증식해가는 연쇄로서 생각하는 버릇 같은 것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소통모델로 번역을 생각하는 것에 내가 순응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것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략) 번역의 번역의 번역 …… (후략)5
그가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폐쇄영역으로 표상된 언어와 다른 자기완결적인 폐쇄영역으로 표상된 언어 사이의 의미교환”으로서가 아닌, “사람들이 ‘타자’에게 열려 있다는 것, 즉 사람들의 사회성의 행위”6 로서 번역을 ‘감각’할 때, 번역이란 그 자체로 이주의 행위와 공명한다. 즉, 흐른다. 심지어 이처럼 나와 타자(성), 즉 나와 내가 아닌 상태가 공존하는 순간에 비로소 발생되는 흐름이란 부수를 포함하되 부수와의 관계는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한자의 형성 매커니즘과 닮아 있는 동시에 벤야민식 친화성의 상징 또한 획득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종국에는 주체 내부의 타자를 발견하게/도모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마치 사카이가 자신의 책에서 적절히 인용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표현에서처럼 말이다: “자기 언어와 다른 언어를 할 때 뿐만 아니라 자기 언어 속에서도 외국인 되기. 방언이나 사투리도 없이 하나의 동일한 언어 속에서 두 언어나 다언어 사용자 되기.”7
그렇다면 <흐르는 춤>의 경우에서처럼, 주체와 주체 외부의 병치 상태가 각각의 춤추는 몸을 매개로 서로 다른 몸의 공존, 서로 다른 시공간의 공존, 서로 다른 기억의 공존 등의 양상으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춤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각자의 몸에 기입된(inscribed) 움직임의 결들을 겹겹이 떼어내어 춤의 복수성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복수성을 다시금 무대 위에서 펼치는 라이브 퍼포먼스의 형식 안에 옮겨 놓는 것. 그런 점에서 세 퍼포머가 공통적으로 구현해내는 ‘부채춤’이라는 특정 춤의 형식, 그리고 다름으로써 같은 그들의 부채춤이 공통적으로 건네는 질문, 즉 ‘춤의 복수성을 어떻게 무대 언어로 옮기는가’에 대한 질문은 <흐르는 춤>의 부수를 이룬다.
Epilogue
번역에의 고찰을 경유함으로써 춤에 다가가고자 하는 필자의 시선은 <흐르는 춤>의 창작 여정에 동행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획득된 것이다. 현재 예술계에서 통용되는 ‘번역’이라는 용어는 의미상 ‘타 매체로의 전환 혹은 서로 다른 매체 간의 해석’ 정도에 머무는 경우가 많은 반면, 이번 <흐르는 춤>에서는 언어 번역의 과정 중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세 퍼포머의 춤추는 몸을 통해 발현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상술했듯이 이번 작품에서 유일하게 소재로 등장하는 춤 형식은 ‘부채춤’이다. 그러나 정작 퍼포머들이 실제 소재로 취하는 부채춤의 양상은 직접 배운 부채춤, 보고 배운 부채춤, 보기 좋은 부채춤, 김백봉류 부채춤, 대학입시형 부채춤, 상상하며 자가습득한 부채춤, 유튜브를 통해 배운 부채춤, 사진 이미지를 보고 따라서 춘 부채춤, 형태 만들기형 부채춤, 공동창작으로 만들어낸 부채춤, 타인이 춘 부채춤 등 매우 다양하다. 이 같은 복수형의 부채춤’들’은 정전화된 춤의 계보에서 이탈해 있는 바로 그 상태로부터 부채춤의 ‘번역가능성(Übersetzbarkeit)’을 직조해낸다. ‘부채춤’에서부터 시작하되 ‘부채춤’이라는 표상에 포섭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끊임없이 이주해야만 ‘부채춤’의 실제에 이를 수 있다는 역설. 그와 같은 역설 안에서야 춤은, 비로소, 흐른다.
1 Theresa Hak Kyung Cha (김경년 역), 『DICTEE』,어문각, 2004, 30쪽.
2 Yoko Tawada (필자 역), Talisman, Tübingen: Konkursbuch, 1996, S.121.
3 Ebd. S.122-123.
4 Walter Benjamin,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in: Rolf Tiedemann und Hermann Schweppenhäuser (Hrsg.),Gesammelte Schriften Ⅳ·1,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1, S.13.
5 사카이 나오키 (후지이 다케시 역), 『번역과 주체』,이산, 2005, 9-10쪽.
6 위의 책, 19-20쪽.
7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1980, pp.124-25. 위의 책 69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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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e as Translation (Tanz als Übersetzung)
- Reflections on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Son Okju (Performing arts scholar)
Translation: Kyunghoo Kathy LEE
Prologue
From A Far / What nationality / or what kindred and relation / what blood relation / what blood ties of blood / what ancestry / what race generation / what house clan tribe stock strain / what lineage extraction / what breed sect gender denomination caste / what stray ejection misplaced / Tertium Quid neither one thing nor the other / Tombe des nues de naturalized / what transplant to dispel upon1[1]
To Go
Dance goes. It has come from somewhere and it goes to somewhere. Dance, after having gone by way of different times, races, cultures, and socio-political contexts, spreads like capillaries, powered by inertia of bodies that are dancing here and now. The only thing valid is the going. Dance that is going somewhere does not presume or intend a transparent delivery of historical implications. Even though a dancing body might be conscious of or dependent on it, dance simply moves somewhere again, departing from where meaning converges to and unwittingly going through variations within a particular body’s ecosystem. Not being able to set a direction of its progression betrays the fact that different bodies in unpredictable states are mediating dance. In such a dance are internal/external interventions, and also hesitation and murmurs. Dance as a state of overlapping times of different individuals. An opaque dance which, unlike a diachronic flow that regards dancing bodies as objects for a linear alignment, takes a dislocated state as its only inevitable destination. By paying attention to the physiology of dance –coming from somewhere and going into somewhere– and bracketing the origins and routes of dance in particular in her new dance piece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choreographer Jee-Ae Lim transposes commonly understood and universal impressions layered onto a particular dance repertory into indefinite temporalities engrained in actual bodies. In such a process of transposition is dance “translated” at last.
Daria Jee-Ae Jee-Ae Kyong Soo Daria Kyong Soo
From a formal point of view, Dancing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seems to take the form of a lecture performance in that the Korean fan dance practiced by three performers(Daria Poczatek, Jee-Ae Lim, and Kyong Soo Shin-Nolte) unfold, individually or with an overlap, along with utterance of their memories of dance. While fragments of stored memory of each performer such as anecdotes about dance are clearly one material to the dance, however, the piece attempts at dance as a process of embodying another person’s memory; ‘words’ in this piece is placed beyond the common idea of lecture which presumes a ‘reading’ of the words’ meaning. In this sense, we can say what is sensed from the actual voices of the performers, which continue while on the verge of disconnection and become segmented with a tinge of flow, is less about ‘what is said’ but more about ‘how it is said’ and ‘how words are separated from dance and how dance is defamiliarized through words in turn.’ For the performers, therefore, the language emitted in the form of spoken words is something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possession and could probably be said to be a continuation of a certain state of transition. When Daria reinterprets Hae-Eo-Hwa Dance Group’s dance, created based on Youtube videos, when Jee-Ae passes through the body and dance of Mary Jo Freshley, and when Kyong Soo remembers the dance of Kaya Ensemble she has belonged to for decades, the ‘dance’ and ‘speaking’ that they practice each moment do not mean hybridity of differing temporalities or of different dances and bodies. Such a ‘state’ is actually closer to the coexistence of differences. They can coexist by defamiliarizing one another and by generating difference in the bulging unfamiliarity. Furthermore, the ways of how the Korean fan dance -subject of Dancing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is practiced also implies this way of coexisting. If you expect or understand that this piece is about ‘a professional dancer trained in Korean dance and non-professional dancers for whom it was a hobby perform one of the most popular repertories of Korean New Dance(Sinmuyong), which is fan dance,’ then perhaps what underlies such an expectation and understanding is the ‘imagination that fan dance would be ultimately something acquirable by dancing subjects’ seeking the ideal of fan dance.’ Such imagination invites criteria and perspectives for homogeneous comparison and summons the authenticity of fan dance; but the dancing bodies of performers emerge as Existence on stage that disturbs such imagination, inversely revealing mechanisms of comparison that try to objectify the dance of each one as something a priori and simultaneously transparent and linear. Conditions that are impossible to coexist gather in dancing bodies, materializing a certain state of coexistence. Only when no conditions are denied or absent but materialized as concurrent ‘differences’ do the dances of Daria and Jee-Ae, Jae-Ae and Kyong Soo, and Daria and Kyong Soo start to go somewhere.
Translation of Dance
The coexistence that weaves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also indicates the state of juxtaposition. Yoko Tawada, a Japanese writer who writes in German, raises the following question in her essay called ”The Gate of the Translator or Celan Reads Japanese(Das Tor des Übersetzers oder Celan liest Japanisch)”: “Some people argue that ’good’ literature is practically impossible to translate. (…) But there is an exception such as Paul Celan’s poetry, the Japanese translation of which has deeply impressed me early on.”2 She had been asking herself about the essence of this impression caused by translated literature when she talked to a German scholar Klaus-Rüdiger Wöhrmannon the phone, which led her to pay attention to the Chinese character ‘門(door)’ which is a radical(indexing component) of ‘閾(threshold)’ appearing in the Japanese title of the collection of Celan’s poems, From Threshold to Threshold(閾から閾へ).
A radical is a major component of ideograms. (…) There are ideograms only composed of one radical such as ‘門’ but usually they are accompanied by additional components. All Chinese characters with the radical ‘門’ are related to door in their meaning. Sometimes, however, the meaning of a radical and that of the whole character [which includes the radical – added by author] are so far from each other that the context is almost unrecognizable without the help of a dictionary. Also, when we read, we do not think about the meaning of each component of a character but register the character as a whole. Therefore, I would not have managed to think about a radical in Celan on my own. Only a precise way of seeing given from outside could lead me to think about it.3[iii]
A radical that captivated her attention forms a relationship of both affinity and unfamiliarity with the character it belongs to, in that it is a part of the character in terms of form yet its meaning could be directly relevant or irrelevant to the very character to which it is both a component and the source. This consideration in how Chinese characters stem from multiple characters being juxtaposed and how this results in double relationships between characters also represents, in itself, a characteristic in the mechanism of ‘translation(Übersetzung).’ In his thesis ‘The Task of the Translator(Die Aufgabe des Übersetzers),’ Walter Benjamin distinguished similarity(Ähnlichkeit) and kinship(Verwandtschaft) in language; while the former is limited to the communication of meaning that occurs between the original(Original) and its imitation(Nachbildung), the latter focuses, rather than how individual elements of two languages correspond to each other, on the interrelationship of the two which can arise because they are separate(Trennung).4 What we can notice from Benjamin’s distinction of concepts is that a translation under the single purpose of communication of meaning is like a melting pot which dissolves the spots of differences emerging between languages with a maximized temperature of sameness; at the boiling point of sameness, ‘elements that constitute the physicality of language - rhythms, vitality, or nuances’ and ‘certain translatability that cannot be captured in the network of understanding’ get dissolved in one indistinguishable state, that is, the state called ‘meaning.’ On the other hand, the state of ‘being separate’ inevitably presumes coexistence of differences, affirming a chain of translation that can arise, endlessly repeated, in such a condition of coexistence. Literary scholar Naoki Sakai once revealed his thinking habit in the foreword to the Korean translation of his book,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Because I somewhat had a habit of thinking that translation is not complete within the binary relation of two languages or two groups by simply converting a text to another text but it is rather a chain of endless multiplying leading to the third term, the fourth term, and so on. This may be one of the reasons why I could not adapt myself to seeing translation as a so-called communication model. (…) A translation of a translation of a translation…(…)5 [v]
When he ‘senses’ translation not as “an exchange of meaning between one language represented as a self-contained closed area and another language represented as a self-contained closed area” but as “an act of sociality of people – being open to ‘Others’”6, translation in itself resonates with –that is, goes somewhere with– the act of migration. Furthermore, a going that occurs at the moment when I and Other(ness), that is, I and a state of not being I, are coexisting resembles the mechanism of composing Chinese characters of incorporating a radical yet having an inevitably variable relationship to it and acquires a symbol of Benjaminian kinship at the same time; and further, it ultimately becomes an opportunity to discover/seek an Other within a subject as well. Just as Deleuze and Guattari’s words which Sakai aptly quoted in his book: “To be a foreigner, but in one’s own language, not only when speaking a language other than one’s own. To be bilingual, multilingual, but in one and the same language, without even a dialect or patois.”7[vii]
Then, when the juxtaposition of a subject and its exterior appears as coexistence of different bodies, of different space-times, or of different memories with the mediation of each dancing body, as in the case of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we might be able to say it is ‘translation of dance.’ To restore dance’s plurality by detaching each layer of movement inscribed in each individual body. And to transplant this plurality again in the form of live performance on stage. In this regard, the form of the Korean fan dance, a specific type of dance embodied by all three performers, and the question commonly posed by their fan dances -which are the same by being different-, in other words, the question about ‘how to transpose the plurality of dance into stage vocabularies’ are what constitutes the radical of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Epilogue
My approach to dance via the consideration of translation is something spontaneously acquired joining the creation process of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The term ‘translation’ commonly used in the arts scene usually means ‘transition into another medium or interpretation between different media’ but I found it interesting that the phenomena witnessed in the process of language translation are manifest through the dancing bodies of the three performers in Dance is going somewhere by itself. As mentioned above, the only dance form used as a material in this work is the Korean fan dance. The aspects of fan dance that the performers actually use as one, however, are very diverse: one that is learned firsthand; learned by watching; one that looks good; in Kim Baek-bong style; helpful for university entrance; self-taught by imagination; learned from Youtube; one that copies photographic images; one that is about making forms; created collectively; and one that is practiced by another person. These plural fan dances weave the translatability(Übersetzbarkeit) of fan dance out of the very state of deviating from the so-called authentic lineage of dance. The paradox of beginning from fan dance yet having to constantly slip and constantly migrate while not being captured by the representation of fan dance in order to reach the actuality of it. Only in such a paradox does dance begin to go somewhere, at last.
1 Theresa Hak Kyung Cha, Dicte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1, p.20.
2 Yoko Tawada, Talisman, Tübingen: Konkursbuch, 1996, S.121.
3 Ebd. S.122-123.
4 Walter Benjamin,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in: Rolf Tiedemann und Hermann Schweppenhäuser (Hrsg.),Gesammelte Schriften Ⅳ·1,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1, S.13.
5 Naoki Sakai (translated by Takeshi Fujii),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Yeesan, 2005, pp.9-10.
6 Ibid., pp.19-20.
7 Naoki Sakai,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on Japan and cultural nationalism,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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